Real Madrid Club de Fúttbol, 레알 마드리드 클룹 데 풋볼, 통칭 레알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에 연고를 둔 프로 축구 클럽입니다. '레알,' 혹은 왕족이라는 이름은 1920년 알폰소 13세가 소시에다드, 사라고사, 베티스, 그리고 유니온 데 이룬과 함께 받은 칭호로, 그때부터 레알 마드리드라는 이름과 왕관을 씌운 엠블럼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02년에 창단한 팀은 스페인 1부리그인 프리메 라 리가에서 한번도 강등된적이 없으며, FIFA의 창립멤버이자 이제는 유러피언 클럽 연합 (ECA)로 대체된 G-14 역시 참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1950
년대 스페인과 유럽 축구계의 절대강자 자리를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스페인 구단이며, 9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31개의 라리가 타이틀, 18개의 스페인 코파 델 레이 (국왕컵), 8개의 수페르 코파, 2번의
UEFA컵 우승과 1개의 UEFA 수퍼컵, 3개의 인터컨티넨털컵이라는 대기록으로 FIFA로부터 20세기 최고의 클럽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II. History
i. Origin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는 옥스포드 유학생들이 마드리드에 축구를 전파하며 시작된다. 1987년 클럽 스카이를 창단한 학생들은 일요일
Moncloa에서 항상 공을 차곤 했다. 1900년에는 이 클럽이 뉴 풋볼 데 마드리드와 클럽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로 갈라지게
되는데,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는 1902년 또 한번 갈라져 마드리드 풋볼 클럽이 되었다. 3년후, 1905년 마드리드 FC는
스페인컵 결승전에서 아틀레틱 빌바오에게 승리하며 첫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된다. 1909년에는 클럽의 회장이었던 아돌포
메넨데즈가 스페인 FA에 서명하며 로열 스페인 축구 재단에도 창립멤버로 참가하게 된다. 1912년 캄포 데 오'도넬로 이사를 한
클럽은 1920년 알론소 13세에게 '레알'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아 본격적으로 레알 마드리드 CF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ii. Santiago Bernabéu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예스테는 1945년 클럽의 회장이 된 인물로, 레알 마드리드 역사에 빼놓을수 없는 중요한 사람이다. 그의
회장임기동안 클럽은 스페인내전으로 피해를 입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 (당시엔 에스타디오 차마르틴이라고 불렸다)과 시우다드
데보르티바였던 훈련장을 복구했다. 그리고 1953년 그는 해외의 세계정상급 선수들을 데려오는 전략을 썼는데, 그중 하나가 전설적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였다.
1955년, 프랑스 스포츠 저널리스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베르나베우와 몇명의 축구계 인사들은 현재의 UEFA 챔피언스 리그에 해당하는
토너먼트를 만들다. 그의 지휘 아래, 레알 마드리드는 스페인과 유럽 축구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
후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레알 마드리드는 5년 연속 유러피언 컵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워 오리지널 우승컵을 영구보관하고
UEFA 영예의 배지를 사용할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1966년 FK 파르티잔을 2-1로 이기며 여섯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린 팀은,
대회 사상 최초로 선수들이 전부 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는 팀이기도 했다. 이때 팀은 비틀즈의 노래 'She Loves
You'에서 따온 'Ye-yé'라고 불리게 되는데, 팀 선수들 중 네명이 비틀즈 가발을 쓰고 마르카를 위해 포즈를 취한데서 유래했다.
1970년대에 레알 마드리드는 리그 우승컵을 다섯번, 코파델레이를 세번 들어올렸다. 그리고 19078년 7월 2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아르헨티나 월드컵 대회기간 중 죽었다. FIFA는 토너먼트 중 3일간의 애도기간을 선포했고, 다음해 레알 마드리드는 그를
기념하며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컵 토너먼트를 만들었다.
iii. Quinta del Buitre
1980년대 초반, 레알마드리드는 라리가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상실했지만 퀸타 델 부이트레로 대표되는 스페인국적 선수들은 다시 한번
부흥기를 시작했다. Quinta del Buitre는 독수리 형제/보병대라는 뜻으로, 선수들 중 하나였던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의
별명에서 따온 닉네임이다. 이 시대에는 마누엘 산체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미첼, 미구엘 파르데사, 마르틴 바스케즈등의 선수들이 클럽에서 뛰었다. (1986년 파르데사가 사라고사로 이적한 뒤) 라 퀸타 델 부이트레와 키퍼였던 프란시스코 부요, 미구엘 첸도, 우고 산체스 등의 세계정상급 선수들을 가지고 있던 레알마드리드는 1980년대 UEFA컵 두번, 라리가 연속 다섯번, 코파델레이 한번, 수페르컵을 세번 우승하며 세계 최고 클럽으로써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1996년, 로렌조 산즈 회장은 카펠로를 감독으로 내정했다. 그의 감독직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그 기간동안 레알 마드리드는 로베르토 카를로스, 미야토비치, 슈케르, 시도로프 등의 선수를 라울, 페르난도 이에로, 사모라노, 레돈도가 있던 클럽의 스쿼드에 추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미야토비치의 한골에 힘입어 유벤투스를 1-0으로 이기며 32년간이나 기다려왔던 일곱번째 유러피안컵 우승을 일궈냈다.
iv. Los Galacticos
2000년 6월,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클럽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클럽의 빚을 청산하고 시설들을 현대화 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지만,
당선의 주된 이유는 루이스 피구의 영입이었다. 다음해, 클럽은 마드리드 중심부에 위치하던 시우다드 데포르티바를 마드리드시와
네개의 회사들에게 매각하며 충분한 자금력을 얻었고 곧바로 그 유명한 '갈락티코'를 건설하는데 착수했다. 갈락티코는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 루이스 피구, 로베르토 카를로스, 라울과 데이빗 베컴 등의 스타군단을 일컫는 말로, 천문학적인 액수가 들어간 이 도박이
성공했는지는 여전히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갈락티코 1기 시대에는 2002년 유러피언컵과 인터컨티넨털컵 우승, 2003년
리그우승 이후 3시즌간 이렇다할만한 우승컵을 가져오지 못했다.)
2006-7
과 2007-8 시즌, 카펠로 감독과 칼데론 회장 휘하의 레알 마드리드는 4년만에 리그우승을 했다. 그리고 2009년, 페레즈는
재선되었고 그의 갈락티코 정책은 AC밀란의 카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호날두, 리버풀의 알론소 등을 데려오며 지속되고 있다.
III. Grounds
캄포 데 오'도넬 1912년, 캄포 데 시우다드 리네알 등을 전전하던 레알 마드리드는 마침내 1923년 5월 17일, Estadio
Chamartín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첫 경기를 가졌다. 22,500명의 관중을 수용했던 이 경기장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첫번째 라리가 타이틀을 따내며 자축했고, 1943년 베르나베우 회장은 경기장이 클럽의 야심에 비해 작다는 결정을 내려 증축을
시작해 1947년 12월 14일 재개장했다. 이 경기장에서 처음 열린 경기는 포르투갈 클럽인 Belenenses와의 경기로, 레알
마드리드가 3-1로 승리했다. 1955년 투표에서 압도적은 득표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이라고 명명되었다.
1953년, 1999년, 2003년 등 지속적으로 스타디움을 증축을 거쳤고, 이제는 80,354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경기장이 되었다.
UEFA와 FIFA규정에 맞는 5성급 경기장으로써 1964 유러피언 챔피언십 결승, 1982년 FIFA 월드컵 결승, 1957,
1969, 1980 유러피언 컵 결승, 2010 챔스 결승을 주최했다. 경기장은 마드리드 메트로 10호선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역에 인접해 있다.
2006년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트레이닝 스타디움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기념해 그의 이름을 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스타디움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제는 마드리드시 바깥에 위치한 발데베바스 연습구장의 일부분이 되었다. 5000명을 수용하는 이 경기장은 주로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의 홈구장으로 쓰이고 있다.
라리가 최장기간 무패 기록: 121경기 (1957년 2월 17일부터 1965년 3월 7일까지.)
V. Rivalries
i. El Clásico
스페인어로 '클래식'을 의미하는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간의 치열한 라이벌 전으로, 카스티야 지방과 카탈루냐 지방을 각각 대표하는 클럽들의 더비라 정치적인 색을 갖고 있기도 하다. 혹자들은 엘 클라시코를 스페인 내전의 축구버전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1939-1975) 독재정권 시절에는 그가 스페인어(Castillano)을 제외한 모든 언어를 금지했고, 바르셀로나는 '클럽 그 이상'의 기치를 내세우며 카탈루냐인들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Manuel Vázquez Montalbán에 따르면, 당시 카탈루냐인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표시할수 있었던 일은 바르셀로나 서포터가 되는것이었다고 한다.
반면, 레알 마드리드는 파시스트 정권과 압제적인 중앙정권의 '화신'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 중 양클럽의
선수들은 똑같이 불이익을 겪었다. 베르나베우는 결코 중앙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으며, 그의 업적 중 하나는
클럽내부에서 부서들이 독립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한 현대축구의 구조의 창안이었다. 마드리드의 역대 회장들 중 몇명 또한 정치범으로
학살당한 전례도 있다. 이 시기의 프랑코는 스페인의 독재자였지 유럽의 독재자가 아니었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레알 마드리드의 성공에 대한 정부개입설은 타당하지 않다. 레알 마드리드는 오히려 다섯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일궈냄에 따라 프랑코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1950년대에 들어섬에 따라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간의 라이벌 의식은 더욱 심해졌는데, 그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이적을 둘러싼 잡음때문이었다. 이후로 몇번이나 유러피언컵 무대를 포함해 서로를 상대한 그들의 화려한 라이벌전은 2002년 전세계에서 500만명의 시청자 기록을 세움으로 세계 3대 더비로써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ii. El Derbi Madrileño
마드리에노 더비는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간의 연고지 더비이다. 레알 마드리드가 압도적인 전적을 가지고 있지만, 1965년 ATM은 레알 마드리드를 첫번째로 이긴 팀이 되기도 했다.
2013년 현재, 레알 마드리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더비전에서 13년간 무패를 기록하고 있으며, 5월 17일 코파델레이 결승전이 두 팀 사이에서 열릴 예정이다.
ref. 레알 마드리드 공식 홈페이지, 스페인 역사(...)강의 들으며 받았던 논문들, 위키피디아, 스탯은 레알 마드리드 포럼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