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봄이었습니다. 빌바오에선 비가 한참 내리는 시기였고, 카시야스-페르난데즈 가족은 그들의 첫 아이의 출산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첫 아이가 남자일지, 여자일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마리 카르멘은 여자아이를 원했고, 호세 루이스는 남자아이를 원했죠.
그리고 그당시엔 초음파 기술이 없었기때문에 이 불확실함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아침, 마리 카르멘은
Casco Viejo 근처로 산책을 나갔다가, 한 켤레의 부츠를 사러 신발가게에 들어가게 됩니다.
가게 직원은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죠. 그는 거의 50대에 다다른 남자였는데, 이 스물 몇살 먹은 임산부에게 농담을
던졌습니다. "그때 제 배가 많이 나온 상태였고, 아기가 크다는건 다 알 수 있었어요. 그 남자는 제게 친절하게 대해주려고
하면서, 제가 바스크 억양이 없다고 했죠. 그래서 전 제가 원래 마드리드 태생이지만 지금은 여기에 살고 있고, 아이를 낳으러 다시
마드리드에 돌아갈 거라고 말했어요. 사실 그때 좀 웃겼어요. 그 사람이 제말이 끝나자마자 왜 마드리드로 아이를 낳으러 돌아가냐고
물었거든요. 그는 내 아기가 아들일게 분명하고, 축구선수가 될게 확실하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빌바오에서 아이를 낳아서, 아이가
아틀레틱 빌바오와 레알 마드리드 두 팀을 위해 뛸수 있게 해야한다고 했어요. 마드리드로 돌아가면 아이는 오직 레알마드리드'만'을
위해서 뛸수 있으니까요."
지금 입고 있는게 아틀레틱 유니폼이란 말이야?
30년 후에도, 마리 카르멘은 그 순간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아이가 남자아이일거라고 말할때마다 조바심을
내고 있었는데, 이 남자는 한술 더 떠서 아기가 축구선수가 될거라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녀는 "내 아이가 축구를 할지 안할지는
아무도 모르는거에요. 제가 바라는것 딱 한가지는 아이를 건강하게 출산하는거죠. 그리고 전 저처럼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딸을
원해요"라고 대답했죠.
그렇지만 그 신발가게 직원의 예언은 결국 들어맞았습니다. 아기는 남자였고, 태어났을때부터 축구선수였으며, 그가 마드리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기가 '오직' 레알 마드리드를 위해서 뛸거라고 결정했죠. 아버지는 이 결정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갖고 있어서,
아이가 그때 Torneo Social의 한 부분이었던 Losada팀의 하늘색 유니폼을 입기 전까지는 아무런 팀도 응원할수 없게
했죠.
마리 카르멘과 호세 루이스는 아들 이름을 이케르라고 부르는데 이견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다 가족들과 상의를 했고, 그 이름이 모두들
가장 좋아하는 이름이었거든요. 스페인어에는 "Iker"의 의미를 전달할수 있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이케르는 "Ikerne"의
남성형이고,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방문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죠.
Móstoles에서 이케르의 유년기는 다른 아이들과 다를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걷기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축구공에
사로잡혔는데, 열렬한 축구광이던 그의 아버지는 이걸 굉장히 환영했고, 축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배울 의향도 없던 어머니는
분노했죠. 형제가 아무도 없었기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이케르의 팀동료가 되었고, 이케르가 여섯살, 일곱살이 될때까지 두 사람이
Joan Miró의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면서 돌아다니지 않은 일요일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케르는 항상 곧장 골대로 향했습니다. 그가 공격수가 되길 원한적은 흔지 않았죠. 이웃 소년들이 즉석에서 경기를 할때도, 이케르는
골키퍼를 고집했습니다. 골대 사이에서 그를 움직이게 할수가 없었죠. 이케르는 보통 제나이보다 많은 소년들과 뛰었는데, 그
소년들조차 이케르의 용기에 감탄했었습니다. 그 꼬마는 공을 모두에게 던지고, 콘크리트 바닥으로 다이빙 하는걸 무서워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이케르가 여덟살이 되었을때, Poviso라는 Móstoles의 팀이 이케르와 계약을 하고 싶어했지만, 결국엔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1학년부터 5학년까지 이케르는 Pablo Piccaso 초등학교에서, 6학년에서 8학년까지는 Vicente Aleixandre
중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3년의 고등학교 기간은 Cañaveral 고등학교에서 마쳤죠. 그는 좋은 학생이었지만, 늘 공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이케르는 태권도 역시 좋아해서, 주황띠까지 땄다고 해요.
이웃의 모든 나이많은 소년들은 호세 루이스에게 '아저씨 아들은 좋은 골키퍼에요, 용감하고, 킥도 잘 차고, 반사신경도 좋다'고
말했죠. 그 모두가 좋은 골키퍼가 되기 위한 자질들이었구요. 하루는, 그 아이들 중의 하나가 마르카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1981년생 아이들에 대한 입단테스트를 한다는 광고를 봤다는 말을 했습니다. 호세 루이스는 이 정보를 확인하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로 향했죠. 그게 1990년 6월이었습니다. 호세 루이스는 신청서를 받아서 작성을 마치고, Móstoles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잃을건 아무것도 없고, 아들은 가능성이 있다고 자기최면을 걸었죠.
왜
레알 마드리드였을까요? 아틀레티코도 아니고, 집에서 더 가까운 마드리드 남부에 있는 팀들이 아니고? 그건 호세는 만약 레알
마드리드가 거절을 한다면, 그래도 다른팀 입단시험을 볼수 있는 시간이 남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9월에 팀에서 이케르에게
시험에 대한 전화가 왔습니다. 입단시험은 연습경기로 이뤄져 있고, 다른건 아무것도 없었죠. 그들은 이케르에게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했습니다. 몇달이 지났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죠. 마침내 전화가 온건 1월이었습니다. 1991년 1월 12일이 '역사적인'
날이었죠. 이케르는 그날을 절대 잊지 못할겁니다.
"전 그 시험날 제가 어땠는지 기억도 못해요. 아마 평소보다 좀 더 긴장을 했었겠죠. 제가 기억하는 건 그냥 모든게 변했다는거에요.
그날 우린 Ciudad Deportiva로 갔죠. 전 제가 여섯살이었을때부터 골키퍼를 하고 싶어 했어요. 제 삼촌과 숙모가
한쌍의 장갑을 선물로 주셨었고, 그때부터 장갑을 절대 벗지 않았기 때문에 늘 골대를 지켰죠. 그땐 아무도 골키퍼를 보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여덟살이었을때 입단시험을 보러 갔는데, 그들이 저한테 아직 전 너무 어리다고,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말했었어요. 3,4개월이
지나서야 전화가 왔죠. 어머니는 저한테 헛된 희망을 가지지 말라고, 그들은 그냥 제가 희망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전화를 하겠다고
말했지만 정말 하지는 않을거라고 하셨죠. 그렇지만 전화는 왔고, 전 Trofeo Social에 등록했어요."
그게 첫번째 단계였습니다. 그 당시에 레알 마드리드는 선수들을 육성하기 위한 시스템이 있었고, 그게 이케르가 등록된 Trofeo
Social (트로페오 소시알)이었죠. 그 해는 XXIX회였고, 벤하민과 두개의 알레빈, 세개의 카테고리에 열여섯팀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팀들은 1군선수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이케르는 벤하민 카테고리의 Losada 팀에 들어갔죠.
그
당시 그 시스템의 책임자는 안토니오 메스키타였습니다. 그는 클럽의 칸테라(유스) 시스템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코치로써
Ciudad Deportiva에 하루종일 있었습니다. 그가 이케르를 발견한 사람이죠. 많은 사람들이 라울의 발굴에 대해 자기가
했다고 말하지만, 이케르의 경우엔 단 한치의 의심도 없습니다. 메스키타는 이 아홉살짜리 소년이 레알 마드리드의 골키퍼가 될 자질이
있다는걸 알았고, 그의 커리어 내내 이케르를 응원했습니다. 오래된 Ciudad Deportiva에 돌았던 전설은, 메스키타의
친구이자 스카우터의 기질이 있는 don Julio가 Móstoles의 운동장에서 이케르가 커가는 모습을 보고 추천했다는 얘기였죠.
어찌됐건 간에, 메스키타는 시스템의 모든 선발과정에서 이케르를 지지했습니다.
그
첫날은 호세 루이스에게 잊지 못할 날이었습니다. Ciudad Deportiva에서의 첫 경기였죠. 그들은 호세의 붉은 Seat
124를 타고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우리가 안에 주차할수 있게 해줬고, 이케르는 옆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던 왼쪽
구장에서 뛰었죠. Losada가 Lopetegui를 상대했던 경기였습니다. 이케르는 후반전에 투입됐는데, 그는 침착하게
잘했었어요. 그게 제가 원하던 거였죠. 침착하고, 이케르 본인이 되는거요. 전 그에게 만약 네가 선택되면 좋은거지만, 아니더라고
상관 없다고 말해줬어요."
이케르의 팀은 그날 7-1로 졌고, 이케르는 5실점을 했습니다. 그 해 우승은 이에로팀이었죠. Losada는 여섯팀 중 5위를 했고, 3승 3무 9패에, 46 득점, 65 실점을 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우릴 뛰게 했어요. 전 그게 또 다른 트레이닝이나 시험이 될 줄 알았었죠. 옷도 맞는 옷을 입지 못했었는데…. 그게 제가 5실점 한 후 나 자신에게 한 변명이었습니다."
이케르는 안토니오 메스키타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한 말들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습니다.
"그는 그의 말에 대해 굉장히 진실했어요. 우리는 아이들이었지만 그의 말을 이해했죠. 적어도 저는 그랬어요. 그는 여기엔 우리 같은
아이들이 200명이 있는데, 팀은 최고의 40명을 선택해서, 그 40명을 또 반으로 줄이고, 그 중에서도 아마 한두명만이 1군에
들어갈 수 있을거라고 말했죠. 이게 정확히 들어맞았기 때문에 아직도 이 말을 기억해요."
파리로의 첫 여행.
열여덟명의 소년들이 최종선택을 받아 벤하민7 팀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케르도 그 중 한명이었죠.
그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Meudon 국제 토너먼트에 참가했었습니다. 그건 이케르의 첫번째 비행기
여행이었죠. 결승전은 이케르의 10살 생일날이었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벤피카에게 승부차기에서 지고 맙니다.
1991-92 시즌에 이케르는 레알 마드리드(알레빈 B팀) 선수로써 처음 우승을 경험합니다. 그는 자기보다 한 살 더 많은 라이벌을 상대로 리그우승을 했죠. 이케르의 팀은 단 두 경기밖에 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케르는 모스톨레스부터 시우다드 데포르티바까지 일주일에 3일,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항상 이케르를 차로
데려다주었고, 늘 훈련을 지켜보았죠. "이케르가 훈련하는 걸 지켜보는게 제 의무라고 생각했죠. 혹시나 아이가 다치거나, 비슷한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에 대비해서요. 그리고 이케르가 훈련하는 걸 지켜보는게 좋았습니다. 나중엔 이케르를 모든 경기에 다 데리고
다녔죠. 그게 제 부업이었어요."
다음 단계는 알레빈 A팀이었습니다. 알레빈A의 코치는 페드로 디아즈였는데, 그는 구티, 그라네로, 파본등을 감독한적이 있어나, 앞으로 감독할 사람이었죠. 그의 팀은 4년동안이나 무패행진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페드로 디아즈는 "이케르는 굉장히 진지하게 훈련에 임했습니다. 내가 그에게 얘기할때, 그가 아직 아이였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케르는 엄청난 관심을 보이면서 집중했죠. 이케르는 본인이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모든 훈련과 경기를 거듭하며 그는
계속 발전했어요. 그는 매우 책임감 있고, 진지한 아이였습니다. 이케르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이 남아있네요. 이케르가 18살인가,
19살이었을때 이미 1군과 훈련을 하고 있었을때, 하루는 그가 시우다드 데포르티바에서 저를 보고 오더니 포옹을 해주더군요. 모두들
그러지는 않거든요"라고 이케르를 기억했습니다.
나이키 컵, 그의 첫번째 big title.
이케르는 이제 인판틸 B팀으로 올라갔고, 거기서도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시즌인 1994-95 시즌엔 파코 히메네즈가
감독이었던 인판틸 A팀으로 올라갔죠. 인판틸 A는 그 해 리가와 국내 나이키 프리미어 컵을 (14살 이하 축구선수를 대상으로 한)
우승하며 파리에서 열리는 유러피언 나이키 프리미어 컵에 스페인 대표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1995년 5월 1일에 레알 마드리드는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를 이겼고, 결승전 경기는 승부차기까지 이어졌는데, 이케르는 한번 선방을 했고, 다른 한번은 상대편의
실축이었습니다.
파리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결승전에서 만나게 됩니다. 경기는 1-1로
끝났고, (결승전에서 한골이 이케르의 토너먼트 전경기 첫 실점이었죠.)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마드리드가 5-3으로 우승하게
되었습니다. 이케르가 마지막 키커의 슈팅을 막아냈고, 대회 베스트 골키퍼로 선정되었죠. 루이스 피구가 유로디즈니에서 시상을 했고,
나이키는 이케르의 환상적인 퍼포먼스를 보고 3년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나중에 1군과 스페인 대표팀에서 이케르와
다시 만나게 되는 파코 히메네즈는 그 때의 이케르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 대회에서 이미 이케르가 놀라운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동작은 엄청난 속도를 갖고 있었죠. 그는 굉장히 민첩하고, 굉장히 빨랐어요. 이케르는 환상적인
반사신경과, 주장이 되기위한 조건들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팀의 중심이 되는 아이들과 함께였지만, 굉장히 예의바른
소년이었고, 그가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죠. 전 아직도 그의 아버지와 좋은 친구로 지냅니다.
우린 이케르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그의 아버지는 이케르를 헌신적으로 응원해주었고, 지금의 이케르가 만들어진데는 아버지
도움이 컸죠."
대회 우승을 한 덕분에, 팀은 미국으로 포상 여행을 떠났습니다. 나이키 본사가 있는 포틀랜드를
구경하고 LA도 구경했죠. 관광 중간중간 팀은 세번의 친선경기도 치뤘습니다. 그리고 마드리드에 돌아왔을때, 리그우승을 했던
발다노의 레알 마드리드가 베르나베우에서 파시요를 해주었습니다.
U-15 월드컵 in 볼리비아.
그건 1995-96시즌이었습니다. 이케르는 라파 로페즈가 감독으로 있던 카데테B팀에 있었죠. 리그에서 팀은 25경기를 이기고,
한번의 무승부를 거뒀고, 나이키 프리미어 컵을 우승하며 볼리비아에서 열린 U-15 월드컵에도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정은
안토니오 메스키타가 지휘하게 되었죠. 하지만 산타 크루즈 데 라 시에라의 호텔과 팀이 먹게 될 음식을 본 메스키타는 대회를
계속할지, 집으로 돌아갈지 클럽과 상의를 하게 됩니다. 최악은 첫날 밤이었습니다. 레스토랑의 음식이 도저히 먹을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메스키타는 팀에게 일어나 나가자고 말하죠. 그들은 결국 슈퍼마켓에 가게 됐습니다.
다음날,
메스키타는 미네랄워터와 먹을만한 음식을 달라며 대회조직위와 협상을 합니다. 레알 마드리드는 경기를 위해 남았고, 네 팀이 서로
경기를 하는 마지막 라운드에 진출했죠. 마드리드는 첫 두경기를 이겼고, 마지막엔 주최국 팀이었던 Tahuichi와 맞서게 됩니다.
주최측은 룰을 자기들 방식대로 해석하면서, (두 팀의 승점이 같았지만) 만일 경기가 무승부로 끝난다면 Tahuichi가
챔피언이라고 말했습니다. 메스키타는 물론 반발하며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도 진짜 규칙에 따른다면 레알 마드리드가 챔피언이라고'
주장했죠. 그리고 정확히 그게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고, 레알 마드리드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길었던
7분의 추가시간 끝에 챔피언이 되었죠.
그날 밤의 스타는 이케르 카시야스였습니다. 그는 거의 완벽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죠. 경기가 끝나고 나서 이케르는 그라운드 위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가 긴장해 있다는건 목소리만 들어도 알수 있었습니다.
이케르는 굉장히 빠르게 말하고, 대답을 생각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죠.
"우리는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들도 노력했죠. 이건 big win이에요. 그들은 챔피언처럼 싸웠지만, 우리가 골 평균으로 이겼습니다…그래도 골평균은 유효해요, vamos, vamos!"
리포터는 그에게 팀의 누가 가장 잘했냐고 물어봤을때 그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팀이니까요. 필드위에 있었던 열한명 전부
다 잘했죠. 우리 모두는 필드 위에서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 하고, 전 제가 할수 있는 모든걸 팀에 주는만큼 다른 선수들도
그렇게 하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팀을 응원하냐는 질문도 받았죠. 처음에 이케르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리포터가 다시 질문을 반복하자, 이케르는 "전 죽을때까지 레알 마드리드를 응원해요"라고 했죠. 그리고 이케르는 그의
우상은 부요, 후안호 발렌시아와 슈마이켈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라파 로페즈는 "제가 하나 실수를 했죠. 이케르에게 넌
4년만 있으면 1군에서 뛸거야, 라고 했지만 그건 3년밖에 걸리지 않았어요. 열네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골대 사이에서
독보적이었습니다. 그는 다이아몬드였어요. 이케르에 맞서 득점하기는 굉장히 어려웠죠. 1대1 상황에서 그는 절대 지지 않았어요.
결승전에서 전 이케르가 세계 최고의 골키퍼가 될 걸 알았습니다. 그의 선방은 믿을 수 없을만큼 굉장했죠… 클럽엔 제가 사인한
리포트가 있는데, 거기엔 그가 18살이 될때쯤 1군에 있을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케르는 17살에 그걸 해냈죠. 델보스케도
그 리포트를 읽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Juanjo Martin Delgado가 코치로 있던 카데테 A팀에서도
이케르는 계속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그의 팀은 25승 1무로 리가에서 무패행진을 이어갔지만, 코파 데 마드리드 결승전에선
승부차기 끝에 지고 말았죠. 유러피안 챔피언십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했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클럽은 이케르의 가족에게 경제적인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매달 25000 페세타 (150유로=23만원)씩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돈은 이케르
어머니가 관리하게 되었죠. 이케르가 샀던건 새 장갑 한 켤레뿐이었습니다.
몇년 후에, Juanjo가 벤피카의
Heynckes의 어시스턴트가 되기 위해 떠났다가 다시 시우다드 데포르티바로 돌아왔을때 이케르는 Juanjo에게 포옹을 해주기
위해 그의 차를 세웠습니다. 문 반대쪽에서 여성팬들에게 둘러싸여 갇히게 될 걸 알면서도 말이죠.
두단계를 뛰어넘다.
1997-98
시즌에 이케르는 Luis Palmero가 감독하던 후베닐 A팀에서 뛰었습니다. 델보스케는 전부 다 긍정적인 리포트들을 보고
이케르가 카데테 A에서 후베닐 A로 곧장 승격할수 있게 허가를 내주었죠. 팀은 리가에서 19점 앞선 1위로 우승했습니다. 그
시즌에 이케르는 3부리그에 있던 RMC에 가끔 소집되었죠. 이 때 이케르는 클럽과 처음으로 정식계약을 맺습니다. 3년 계약에
1.5m, 3.5m, 5m (30,000유로=4500만원) 계약이었는데, 다음해 이케르가 3부리그로 올라가며 새로 계약을 맺어야만
했죠. 새 계약은 30m, 35m, 40m (240,000유로=3억6천만원)이었습니다.
팔메로는 이케르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그는 항상 모범적으로 행동했어요. 우리와 5시에 훈련하기 위해서 그는 세시에 학교에서 나와야했죠. 모스톨레스에서
기차로 여기까지 오려면 한시간 반이 걸렸어요. 그는 말썽을 부린적이 없었고, 우리도 그를 한번도 혼낸 적이 없었죠. 그는 지금보다
더 소극적이었어요. 그리고 굉장히 책임감 있게 행동했죠."
이케르의 첫 1군 경험은 그 해에 일어났습니다. 그는 Rosenborg까지 1군과 같이 갔지만, 경기에서 뛰지는 않았죠.
그리고 1998-99시즌 이케르는 RMC로 승격되며 다시 한번 Martin Delgado를 코치로 만나게 됩니다. 목요일과 금요일에
이케르는 1군과 함께 훈련을 했죠. 몇몇 1군선수들이 그를 '날개 밑에 품었습니다.' 콘트레라스와 모리엔테스가
Rosenborg로의 여행에 대해 이케르에게 말을 걸었고, 이케르는 그들이 그걸 기억한다는데 놀랐었죠.
훈련이
아침이었고, 이케르의 아버지가 직장에 있어서 그를 데려다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케르는 시우다드 데포르티바까지 세개의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먼저 그는 모스톨레스의 집에서 기차역까지 한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거기에서 마드리드의 아토차역까지 기차를
탔죠. 그 다음 기차를 갈아타고 차마르틴 역까지 간다음, 베고냐까지 지하철을 타고 갔습니다. 해답은 5만 페세타나 했지만,
탈때마다 135 페세타인 기차나 165페세타인 버스보다 더 경제적이었던 월 정액권에 있었습니다.
그 시즌에,
이케르는 챔피언스 리그에 1군과 동행했었습니다. 그리고 클럽은 단 한번이라도 1군에 소집되었던 선수들을 모두 도쿄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컵에 초정했죠. 이케르는 써드 키퍼로 도쿄에 갔지만, 벤치에 앉지는 않았습니다. 대회 결승전은 Vasco de
Gama를 상대로 12월 1일에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케르는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로베르투 카를로스의 첫번째 골을 보지
못했습니다. 잠시후, 그는 마드리드의 교체선수들을 까고 있던 Vasco de Gama의 선수 한명과 거의 싸움이 붙을뻔 했죠.
"라울이 득점했을때, 그들에게 뭔가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매너를 지키기 위해 가만히 앉아있었어요. 전 제가 경기에 뛰었던 것 마냥
신났던 걸로 기억해요. 코파와 함께 사진을 찍고, 필드를 뛰어다니고, 라커룸에서 샴페인을 터뜨리고, 시벨레스에서 축제를 즐겼죠.
라울 옆에서 코파를 들어올리고, 팬들이 축하를 해줬는데, 그땐 정말 제가 거기 있다는걸 믿을수가 없었어요. 시벨레스에서의 경험이
절대 잊을수 없는 경험이죠. 저와 가장 말을 많이 했던 선수들 중 하나였던 모리엔테스가 제게 열일곱에 세계 챔피언은 아무나하는게
아니라고 말해줬었는데, 그가 맞았었죠…"
며칠뒤 12월 17일에, 그는 공식적으로 1군에 소집되어 오비에도까지
가게됩니다. 알만사는 부상을 당했었고, 오직 일그너만 남아있었죠. 이케르는 벤치에 앉아있었습니다. 월요일에 그는 영어와 수학
시험이 있었죠. 그는 공부를 많이 하진 않았습니다.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팀은 1-0으로 졌죠.
그 해가 다 지나가기전에, 이케르는 베르나베우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허리케인 미치 피해자들을 위한 자선경기에서 데뷔를 했습니다. 그 경기에선 우리의 영원한 라이벌이 이겼죠.
그
다음 시즌, 이케르는 Paco Garcia Hernandez의 지휘 아래에서 2부리그에 있던 Real Madrid B에서
뛰었습니다. 1군에서 토샥은 일그너와 비자리 두 키퍼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었습니다. 일그너는 부상을 당했고, 감독은 훈련 경기
중에 두번의 굉장한 선방을 보여줬던 키퍼를 기억해냅니다. 그게 이케르 카시야스였죠. 그리고 일그너가 부상에서 돌아오자, 토샥은
비자리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로 합니다. 카시야스는 그의 팀으로 돌아왔죠.
그리고 비센테 델 보스케가 1군 감독을 맡게 되고, 그를 호출했을때, 이케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비 알론소
우리가 같은 해에 태어나긴 했지만, 제가 성인대표팀에 합류하기 전까지 이케르와 같이 뛴 적은 없어요. U-21 대표팀 전엔 제가
대표팀 경험이 별로 없었지만, 이케르는 모든 카테고리에서 뛰었었죠. 레알 마드리드에서 동료가 되기 전부터도 저희는 잘 어울렸어요.
동갑이었으니까요. 이케르와 저는 같은 세대 사람이고, 대표팀 합숙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하고, 자유시간에 자주
놀러나가기도 했죠.
이케르는 그냥 보여지는 그대로에요. 굉장히 단순하죠. 이케르는 그런사람이고, 그런 인상을 주는 사람이에요. 가족과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유형의 남자죠.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이 이케르가 편안함을 느끼는 장소고, 그가 있고 있어하는 곳이에요.
라커룸에서 그는 모든 사람의 존경과 애정을 얻어 낸건 바로 그의 태도와 인생과 상황들을 이해하는 능력 덕분이죠.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는데, 이케르는 전자에요. 그건 노력하거나 성취하려고 해서 되는게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모든이의 존경과 감탄을 받는겁니다. 축구에 관해서 이케르는 늘 항상 중요하고 극적인 순간, 팀이 그를 가장 필요로 할때,
나타나는 능력을 타고났어요. 많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예를 들자면 글래스고에서 열렸던 결승전, 월드컵에서 로벤을 막은
것, 유로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페널티킥을 막은 것, 아니면 파라과이를 상대로 카르도소를 막은 것 등이 있죠. 이케르는 마법같은
터치를 가지고 있어요. 그는 결과를 바꾸고, 우승 타이틀을 가져오는 선방들을 만듭니다.
지금 현재엔 훌륭한 골키퍼들이 많지만, 이케르는 이런 중요한 선방들을 하는 능력이 있기때문에 독보적이에요. 이건 확실히 타고나던지,
아니면 아예 없는 능력이죠.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케르와 비슷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어요.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둘 다요.
그는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인간적인 부분에선, 지난 몇년동안 이케르는 많이 성숙해졌어요. 주장이 되는건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이케르는 많은걸 배웠기
때문에 준비되었다고 느끼고 있죠. 옛날 이에로나 라울이 여기 있었던 때엔 이케르가 그 자리를 맡지 않았었어요. 그렇지만 그는
배우는 중이었죠. 그리고 이케르가 리더가 되어야하는 시간이 왔을때, 그는 아무런 문제 없이 그 일을 맡아 해냈어요.
전
이케르를 잘 아는 편이고, 이 변화가 저를 놀라게 했다는걸 인정해요. 그렇지만 이케르는 모든 순간 내내 이렇게 해야하고, 옆집에
사는 소박하고 장난기 넘치는 소년 같은 자기 본모습을 잃지 않으면서 본인에게 주어진 책임감과 의무들을 잘 해내야한다는 생각을
해요. 이케르는 그 어느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습니다. 그는 성숙함을 갖고 말을 하고, 그가 처리해야만 하는 모든 것들을 맡아
해내죠. 그전엔 그에게 이런 부담감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확실히 그런 부담이 존재하고, 이케르는 잘해내고 있어요.
챠비 에르난데스
이케르와 저는 U-17 월드컵 전부터 대표팀에서 함께 뛰기 시작했어요. 전 그보다 한살 더 많고, 그 유스 토너먼트 이전까진 한번도
이케르를 만났던 기억이 없었죠. 그 순간부터 우린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됐어요. 우린 U-17, U-18, U-20
대표팀에서 함께 했고, 이케르는 이미 성인 대표팀으로 승격했었기 때문에 시드니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죠. 그리고 나서 대표팀에서
우리가 함께했던 추억들이 있죠, 유로나 월드컵 같은 기억들이요.
전
제가 이케르에게 굉장한 애정이 있다는걸 공개적으로 인정해요. 그리고 전 진심으로 우리가 좋은 우정을 갖고 있다고 믿어요. 우린
좋든 나쁘든 많은 순간들을, 오랜 시간동안 함께 겪어왔고, 그런게 사이를 더 돈독하게 해줬죠. 그리고 이케르는 사람들이
사랑할수밖에 없는 그런 남자에요. 이케르는 지금도 그렇고, 늘 한결같았어요. 항상 농담하고, 신나하고, 진정성이 있고, 승부욕이
대단하고…아, 정말 경쟁하는걸 좋아해요. 이케르는 경쟁하기 위해서 늘 내기를 하곤 하죠.
저에게 가장 놀라운건 그의 에너지에요. 아, 이케르는 굉장히 친절하기도 하죠. 이케르는 사람들을 혼내기도 하고, 놀리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사람을 존중하며 절대 선을 넘지 않아요. 지금 이케르와 푸이와 제가 주장단에 있는데, 바로 지금이 이케르가 그의 성격을
보여주고, 모든 사람들이 - 팀동료들이나 감독들 - 그를 존경하게 만드는 그런 순간이죠. 이케르가 늘 헌신적이고 모두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가능한거에요. 그는 굉장히 노련해요.
예를 들자면, 저번 마드리드-바르셀로나 경기 이후에 문제가 생기고 상황이 더 악화될수도 있다는걸 모두가 깨달았을때 이케르가 제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했죠. '펠로포, - 이케르는 항상 절 펠로포나 마키나라고 불러요 - 이걸 고쳐야만 해. 우린 이미 이걸
겪을만큼 겪었고, 아직 모든게 최악으로 떨어지는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으니까.' 이케르가 마드리드와 대표팀의 주장인게 정말
다행이었어요. 그렇기때문에 문제를 풀수 있었으니까요. 만약 그 순간 이케르가 중재를 서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 관계들은 더
악화되었을테고 전 결말이 어떻게 됐을지 정말 상상이 가질 않아요. 하지만 이케르는 그가 이케르였기 때문에 뭘 해야하는지 알았죠.
이케르는 전혀 고독한 주장이 아니에요. 그는 모두와 대화를 나누죠. 굉장히 꼼꼼한 성격이에요. 가끔은 저한테 바르샤팬인 동생에게 줄
유니폼을 부탁하기도 하고, 기회가 될때마다 우린 서로 유니폼을 교환해요. 그는 팀 사기를 북돋우고, 팀에 많은 공헌을 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에요. 그런 면에서 우린 서로 닮아 있어요. 저희는 굉장히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기도 해요. 몇년전엔 얘기가
달랐죠. 이케르는 지금 같은 권위를 갖고 있지 않았고, 일들을 조심히 처리해야만 했어요. 지금은 이케르가 본인이 주장임을 느끼고,
잘 해내고 있죠. 이케르가 합숙때 감독님과 일을 처리하거나, 문제들을 처리하는 회의 때 하는걸 보면 놀라울때가 있어요. 그는
절대 속물주의에 물들어 있거나 자존심이 강하지 않아요. 이케르 정도의 위치가 되면 많은 이익들과 혜택을 받을수 있지만, 그는 늘
다른사람들을 생각하죠.
제가 이케르에 대해 가장 좋아하는 건 그의 자연스러움이에요. 이케르는 이중적이지 않은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이죠. 만약 뭔가 말해야
하는게 있다면 이케르는 말해주는 사람이에요. 검소한 사람이기도 하구요. 그러고보니 이케르한테서 뭘 받아본 적이 한번도 없네요.
이케르와 호세바 에체베리아가 저에게 친 장난을 절대 잊을수 없을거에요. 사에즈가 감독으로 있을때, 키예브에서 우리가 비겼던
우크라이나전이었어요. 경기후에 한잔들 하러 나갔었고, 호텔로 돌아와서 저는 자러 갔었죠. 저희 세명이서 방을 같이 쓰고 있었는데,
제가 자는 동안 둘이서 방에 있던 모든걸 제 가방속에 쑤셔 넣었어요. 전화기, 물병, 타월…그런것들요.
다음날 전 굉장히 서두르고 있었고, 공항에 도착할때까지 그걸 모르고 있었어요. 세관에서 경찰이 제 가방을 열었고, 그 무기고를
발견했죠….전 어쩔줄 몰라했죠. 더이상 심각해지진 않았지만, 저에겐 별로 좋지못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이케르는 기회가 된다면
장난을 치는 타입이고, 그래서 제가 이케르와 카드게임을 잘 하지 않아요. 그는 가만히 앉아있질 못하기 때문에 우린 많은 일화들이
있죠.
골키퍼로써의 그는 보증수표나 다름 없어요. 이케르가 뒤에서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경기중에 큰 위안이 돼요. 이케르 같은 존재감을
갖는 골키퍼들은 세계에 몇 없죠; 그의 존재는 자신감을 심어줘요. 1대1 상황에서 이케르는 거의 이길수 없는 존재에요.
끝판왕이죠. 이케르는 주장으로써나, 인간적으로나 굉장한 사람이고, 저는 그를 많이 사랑해요. 사실 누구도 이케르에 대해서 험담할
사람은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특별해요.
헤라르드 로페즈.
이케르와 제가 공존하기 시작한건 유로2000에서 맨처음 엘 살레르 합숙, 그다음 네덜란드와 벨기에였죠. 굉장한 시간을 보냈었어요.
정말 재밌었죠. 제가 매일 잠만 잤기때문에 그는 절 '곰'이라고 불렀고, 전 이케르가 돈을 많이 쓰지 않았었기 때문에
'구두쇠'라고 불렀었어요. 그땐 그랬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전
그때 스물한살이었고, 이케르는 열아홉이었어요. 저희방에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죠. 둘 다 싱글이었고, 자유시간엔 보통 티비로
테니스 경기들을 보곤 했어요. 그해 구스타보 쿠에르텐이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했죠. 내기도 했었어요. 훈련이 없는 날에 선수들은
여자친구나 부인을 만나는게 허락되었었지만, 우린 싱글이었죠. 다른 방들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때문에 많이 웃곤 했어요. 벽들은 별로
두꺼운 편이 아니었고, 거의 모든걸 다 들을수 있었죠. 벽들이 말을 할수만 있었다면…
저희 둘은 동시에 데뷔전을 치뤘어요. 그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겁니다. 한쪽을 돌아봤는데, 거기 이케르가 교체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죠. 동시에 필드에 들어서면서 우리 둘은 떼어놓을수 없는 사이라는걸 느꼈죠. 그 당시에 서로 보면서 웃었더걸로 기억해요.
유로2000 이후에도 대표팀 합숙할때면 이케르와 전 같은 방을 쓰곤 했어요. 마드리드에서 이스라엘전을 치르기 전날 밤엔 Fuente
de Neptuno 옆의 호텔에서 지냈고, 정말 재밌는 시간을 보냈어요. 그 당시에 리얼리티쇼들이 한참 유행이었는데, 아마 제
기억엔 "Gran Hermano"였던 것 같아요, 거기에 완전히 중독됐었죠. 이스라엘전에서 전 한골을 넣었고, 그 이후엔
부상때문에 대표팀에서 뛰는걸 그만뒀어요.
돌이켜보면 이케르의 지금 위치까지 오는게 굉장히 어려울거라고 생각했지만, 전 그당시에도 이케르가 굉장하고, 좋은 사람이라는걸 알고
있었어요. 그는 굉장히 성숙했고, 나이에 비해 엄청난 프로정신을 가지고 훈련에 임했죠. 성격 있는 선수였어요. 훈련할때 보면
자기보다 열살은 많은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곤 했죠. 그때 벌써 본인 성격과 지혜를 갖추고 있었던거에요. 레알 마드리드 같은
팀에서 이케르만큼 오래 뛰며 부담을 견디려면 두가지 다 필요하죠.
시간이 흐르고 나서, 서로 연락은 끊겼지만 바르샤-마드리드 경기에서 일화가 있었죠. 오늘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요. 리그
경기였고, 경기가 끝나갈 즈음에 공이 애매하게 떠 있었죠. 이케르가 골대 문전에서 나왔고, 전 땅으로 떨어졌는데 그때 제 스터드가
하늘을 향한 채였어요. 그 스터드들이 이케르의 얼굴을 때렸죠. 사실 전 그게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케르가 일어서더니 제
멱살을 잡고 저를 때리려고 했어요. 제가 '이케르 미안해, 이케르, 미안하다고!' 라고 소리를 쳤는데 그가 '헛소리 하지마. 날
때렸어, 날 때렸잖아!'라고 했죠.
다행히 그가 침착함을 되찾고, 전 이케르에게 다시 사과할수 있었어요. 제 기억엔 마드리드가 2-1로 이겼던것 같아요. 호나우두가
두골을 넣었고, 클라위버르트가 한골을 넣었죠. 이케르의 유니폼을 아직도 갖고 있어요. 솔직히 전 그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